
사육신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의 충의가 와, 왕방연의 <고운님 여의옵고> 단종의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옛시조이기 때문에 맞춤법과 철자의 오류가 있습니다. 사육신집안의 몰락과 김시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육신 충의가
지은이 -성 삼문-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랑장송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지은이 -박팽년-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지은이 -유응부-
간밤에 불던 바람 눈 설 쳤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진단 말가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요
고운님 여의옵고
지은이 -왕방연-
천만리 머나먼 길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곳 없어 냇가에 않았으니
저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는구나
단종 시
달 밝은 밤 소쩍새 슬리 우니
시름 못 잊어 자규루에 기대었네
네 울음소리 내 듣기 괴롭구나
그 소리 없으면 내 시름도 없을 것을
세상의 괴로운 이들에게 내 말을 전하노니
춘삼월 자규로에는 오르지 마오
사육신 집안의 몰락
단종 복위운동을 주도한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를 사육신이라고 합니다. 이들과 박중림, 김문기, 성승, 윤영손, 권자신 등은 1456년 음력 6월 8일 군기감 앞에서 조정신료들 입회하에 수레로 찢기는 거열형을 당했습니다. 유성원은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했으며, 그들의 아버지와 16세 이상아들들은 모두 교형에 처해졌습니다. 가산은 몰수되고 여성들은 노비가 되어 원수들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육신 시신을 수습한 김시습
김시습은 세종대왕께서 아끼던 천재였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리던 아이였고 3살 때부터 한문책을 줄줄 읽었을 뿐 아니라 한시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궁중에까지 들어가 학문을 좋아하던 세종께서 그의 재능을 보고 매우 감동하여 비단 50 필을 하사하였답니다. 세종대왕과의 약속으로 자라면 단종밑에서 큰일을 하리라 생각했지만 세조의 왕위찬탈로 청년 김시습은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단종복위운동 탄로 나 사육신 참혹한 그들의 훼손된 시신을 노량진에 몰래 매장하였습니다. 몰래 동학사로 가서 사육신단을 세우고 그들의 제사를 지냈는데 이후 단종 소식에 제단을 하나 더 만들어 어포를 올려놓고 단종의 제사를 지내며 '상왕초혼사'라는 축문을 짓고 통곡하였답니다. 김시습은 저항시인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은 작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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